
19세기 초까지 싱가포르는 네덜란드의 영향 하에 있다가 1819년 1월 영국의 래플스(Sir Thomas Stamford Raffles)가 조호르 왕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싱가포르의 개발을 착수하였다. 1823년 6월 7일, 래플스는 매달 2,000달러 이상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조호르왕국의 술탄 거주지역과 떼멩공(Temenggong)을 제외하고 싱가포르 전역을 영국동인도회사에 영구적으로 할양하는 조약을 성립시켰다. 1826년 싱가포르는 말라카와 뻬낭에 흡수되어 동인도회사 지배 하의 해협식민지로 편입되었고, 1867년 싱가포르의 관할권이 영국 식민지청으로 이전되면서 본격적인 식민지시대가 개막되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싱가포르는 일본에 의해 점령당하였으나 일본의 패망으로 1946년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이 싱가포르를 재점령하였을 때 싱가포르 국민들은 영국에 대한 신뢰감 보다는 국민적 자각에서 발아한 민족주의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가 단계적으로 자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형태의 식민정책으로 전환하였다. 1953년 말라야공산당의 위협이 다소 누그러지자 식민 정부는 조지 랜들(Sir George Rendel)을 중심으로 한 자립정부 구성을 약속했다. 자립정부는 총 32석 중 25석을 국민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입법의회와 총리, 각료들이 존재하는 행정부를 갖춘 의원내각제로 구성되었다. 영국 식민정부는 국내 안보나 외교업무, 입법부에 대한 거부권을 유지하였다.
1963년 9월 16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연방의 구성원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채 2년도 못가서 싱가포르의 정치인들이 비말레이계의 단결과 지지를 호소했다는 이유로 말레이시아연방으로부터 추방 아닌 추방을 당하여 1965년 8월 9일 독립하였다. 세계 언론들은 싱가포르의 독립보다 작은 섬나라의 생존 자체가 어려울 것 같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앞세웠다. 국민의 대부분이 무단정착촌에 거주하는 상황이었고, 제대로 된 교육도 실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실업률도 10~12%에 달하였다. 무엇보다도 좁은 국토와 부족한 천연자원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고정 수입원이 없는 상황이었고, 유일한 수입원인 중계무역항은 19세기 이래로 개발이 미진하여 더 이상의 물동량을 소화할 수 없었다.
정부는 경제성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주롱(Jurong) 지역에 산업단지를 건설하고, 싱가포르에 투자하는 모든 외국기업과 투자자들에게 5~10년간 법인세를 면제해 주는 텍스 홀리데이(tax holiday)를 실시하였다. 한편 식민당국이 약탈을 행하는 추출(抽出)무역에서 가공무역으로 산업구조를 전환하기 위해 필요한 숙련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영어를 필수 언어로 채택하여 공교육이나 공기업에서 상용화 되도록 하였다. 종족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해 영어와 함께 국가이데올로기로서 ‘국가애’(national fraternity, 國家愛)를 학교에서 교육 하였다. 주택부족 문제 역시 주택개발공사(Housing Development Board)가 주도한 공공주택 프로그램의 성공으로 국민의 90% 정도가 주택문제를 해결했다.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한 리콴유 총리는 1990년 11월 32년간의 임기를 마감하고 총리직을 고촉동(Goh Chok Tong, 吳作東)에게 이양하였다. 리콴유는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을 거쳐 현재 스승장관(mentor minister)에 임명되어 있기 때문에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것은 아니다. 2004년 8월 12일, 리콴유의 장남인 리센룽(Lee Hsien Loong, 李显龙)이 싱가포르의 3대 총리이자 재정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